박혜수_불안 위에 짓는 성

윤재영 (양평군립미술관 학예연구사)




1. 모든 예술은 늘 각자의 시대와 미묘한 긴장 관계가 있다. 어떤 예술은 시대에 앞서 있다. 그래서 그 작품을 안다고 해서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를 통한 역사 연구의 난점 중 하나는 예술 작품을 엄격한 사료(史料)라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어떤 예술들은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박혜수가 그렇다. 그녀의 모든 작업은 동시대인들의 집단적 정서나 감정 구조를 반영한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말한 바, 어떤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테크닉이 필요한 법이다. 박혜수의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의 세밀한 드로잉(drawing)이 어떻게 변화해온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동시대에서 자아(self)와 세계,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

2. 모든 것을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일까? 과학주의적 동시대에는 확실히 믿을 만한 무언가가 없다. 경험주의적 다위니즘(Darwinism)은 우리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거기서 인간은 단지 적응과 생존을 위해 설계된 존재다. 그런 존재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가능할까?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의미는 단지 세계에 대한 적응과 생존을 위한 것으로 환원된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동시대인들이 “도덕의 원천(moral sources)”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그의 말처럼 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잃어버린 인간들은 결국 불안이라는 늪에 빠지곤 한다.

삶의 원초적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불안한 것, 그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 당장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라. 거기에는 불안에 떠는 동시대인들을 위한 단기적 처방들이 있다. 2013년 DSM-5에 공황장애(panic disorder)가 새로운 병리적 진단 기준으로 등록된 것도, 점프스케어로 유지되는 80-90년대 슬래셔 무비보다 내면의 불안을 강조하는 A24 호러들이 최근 평단의 주목을 받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동시대의 불안은 그 이전보다 강화된 집단적 증상에 가깝다. 과학적 세계관은 인류 문명사의 최고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인간 정신을 갉아먹는다.

박혜수가 작업을 만들어내는 내적인 동력 역시 ‘불안’이라는 심적 상태에서 기원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박혜수의 화면에서 불안이라는 동시대적 징후를 읽어내기 위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형식적 특징과 그녀의 말을 병치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거미의 흐름>을 보자. 이 작품은 앞으로 박혜수의 작품에서 반복될 형식적 특징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거미줄 위로 독특한 기하학적 형태의 거미가 눈에 띄며, 펜과 연필로 그려진 세밀한 선이 강박(compulsion)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반복된다. 박혜수는 그것이 무기력에 발만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반복적인 패턴을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패턴은 보통 불안과 같은 부정적 심적 상태를 통제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는 자아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찍이 정신과 의사 로베르 볼마(Robert Volmat)도 『정신의학 예술(l’Art psychopathologique)』(1956)에서 기하학적 패턴이나 집요한 반복적 구조가 정신병리학적 소견을 가진 환자들이 내보이는 공통된 특성이라 지적한 바 있다. 아돌프 뵐플리(Adolf Wölfli)와 같은 아르브뤼(Art Brut) 작가들이 집요할 정도로 세밀한 패턴을 지녔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Erika Doss, Twentieth-Century American Ar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25
 Charles Taylor, The Sources of the Self: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아마도, 불안한 자들이 패턴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은 인간 내면에 깊이 각인된 심리학적 메커니즘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몇몇 진화생물학자들은 불안이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 위협에 대항하는 경보 장치라 말한다. 그런데 패턴을 통해 불확실한 미지의 것을 조직화하려는 것은 위협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턴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받아들인다면, 박혜수가 보여주는 강박적인 패턴들은 단순한 조형적 유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꽤나 강렬한 의지처럼 보이게 된다. 그녀는 불안에 질서를 부여해 그걸 극복하려 하고 있다.


3. 박혜수의 패턴은 《고립》 연작에서부터 훨씬 정제되고 기하학적인 건축(construction)의 형태를 보인다. 박혜수는 그것이 자아와 자아를 에워싼 세계 사이에서 “따로 떨어져 고립”되었다는 감정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립 Ⅲ>를 보자. 화면에는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체스판 위에 건축적 구조와 반복되는 오브제, 그리고 공간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림이 세밀하면서도 직관적이기에 관람객들은 이것이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라는 정보만 알고 있다면 ‘인생은 정해진 경우의 수로 이루어진 체스 같은 전쟁이고, 우리는 체스의 말처럼 반복되고 정해진 전투를 해야 하는 플레이어‘와 같은 내용도 아마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혜수의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너머에도 있다. 

 박혜수는 눈만 번뜩이게 하는 스펙터클한 색 대신에 무채색(achromatism)을 택한다. 보통 무채색의 화면은 감정을 잃어버리거나 통제하는 자들의 것이고, 그 위에 화면을 가득 채운 반복적인 패턴과 건축과 닮은 구조 덕분에 《고립》 연작은 세계를 마주할 준비가 된 안정적이고 이성적인 자아의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착시(illusion)에 따른 불안함이 자리한다. 그래서 관람객은 그림 안에서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 공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를 어색하게 느낀다든가, 오브제와 구조의 중첩 속에서 분명하게 눈에 익던 패턴 속에서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박혜수의 화면 속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그녀가 천착해 온 ’세계에서 오는 위협과 거기에 대응하는 자아‘라는 주제와 같이 보아야 한다.



4. 불안은 진화생물학자들의 말처럼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심해지면 확실히 병리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말 그들 말대로 생존을 위해서일까? 인간은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의 의미, 곧 자아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노력들은 종종,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 미궁에 빠지고는 한다. 아직까지 그 어떤 논리학자들도 삶의 궁극적 이유에는 명확한 논리적 대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한다.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 언어의 밖에 있다고. 그래서 무채색의 화면에서 집요할 정도로 자아와 세계 사이의 충돌을 그려내는 박혜수의 작업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불안 위에서 성을 쌓으려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몸짓처럼 보인다. 박혜수도 예술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그녀의 작업을 에셔(M.C. Escher)와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에셔의 화면이 수학이라는 무모순적 체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면, 박혜수의 착시는 세계로부터 의미를 구할 수 있는 완성된 자아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둘의 작업은 의도에서부터 갈린다. 박혜수는 에셔가 아니라 아르브뤼와 닮아있다.



 Vija B. Lusebrink, Imagery and Visual Expression in Therapy (New York: Plenum Press, 1996), 205-26
 Melissa Bateson, Benjamin Brilot, and Daniel Nettle, "Anxiety: An Evolutionary Approach," The Canadian Journal of Psychiatry 56, no. 12 (2011): 707-7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현 역 (서울: 책세상, 2006), 124.





5. 흥미로운 것은 박혜수의 드로잉을 만들어낸 불안의 방향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 박혜수의 드로잉들이 세계에 대한 자아의 대응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면, 《현대인의 초상》 연작에 이르러 박혜수는 자신의 불안이 오로지 자신만이 겪는 유별난 것이 아니란 것을 조금 더 명확하게 자각하는 것 같다. 최승호의 시 「북어」의 구절 “너도 북어지”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 역시 그녀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들을 잃어버린 동시대인들이 세계가 요구하는 자아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역설을 진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원래 불안을 만들어내는 무의미에 자아가 대응하는 법은 알려진 바 몇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테일러처럼 약간 미심쩍은 선험적 개념들, 예컨대 도덕의 원천이나 지고선(hypergood) 같은 것들을 다시 인간의 품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선험적인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불안을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 중 일부는 페소아(Fernando Pessoa)가 그랬던 것처럼 자아를 조각내고, 분열하고는 한다. 박혜수는 이 둘 중 어떤 것도 택하지 않는다. 박혜수가 택하는 길은 자아가 아니라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길이다.

불안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박혜수가 제시하는 길은 순진하고 이상적일 수 있다. 바뀐 세계가 우리에게 항상 긍정적일 것이란 보장도 없다. 그러나 박혜수가 내리는 진단은 상당히 받아들일 만하다. 만약 세계의 압력이 자아의 불안을 만드는 변수가 아니라면, 어떤 집단에서도 불안장애를 가진 환자의 비율이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자들의 비율은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특정한 집단, 계층, 직업군에게 더 높게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의 지표들은 세계의 구조적 압력이 개인의 심적 상태에 큰 영향을 준다는 증거다. 

박혜수가 불안의 방향을 자아에서 세계로 돌릴 때, 그녀의 강박적 드로잉은 더 이상 불안을 이겨내는 단순한 심리적 방어막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민낯을 드러내려는 외과 의사의 메스에 더 가깝다. 이제 박혜수에게 불안은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세계를 직시하고 변화를 도모하려는 내적 에너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거기서 한 작가의 개인적 성장을 본다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불안을 동력 삼아 세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본다. 그때, 박혜수가 불안 위에 쌓아 온 성은 세계에 저항하는 인간의 망루가 되어줄 것이다.



 최승호, 『대설주의보』 (서울: 민음사, 1995), 102.